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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적십자회 설립지 터

사적지 종류 장소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상하이
문헌상 長濱路 愛仁里 39號
한글 上海市 静安区 富民路 22弄 앞 공원
현지
역사적 의의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가 설립된 곳
설명
적십자사(赤十字社)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1898년 스페인의 적십자사가 의료시설 관련 자료를 대한제국에 요청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대한제국은 1903년 1월 프랑스 파리의 주재공사인 민영찬(閔泳瓚)을 통해 1864년 제네바협약(Geneva Conventions, 赤十字条約)에 가입했다. 이어 1903년 7월에는 민영찬이 적십자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04년 12월 21일에는 국제적십자사에 가입했다. 국내에는 1905년 대한적십자병원과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됐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통해 국내에서 사업이 진행되었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1909년 7월 21일 대한적십자사는 결국 ‘일본적십자사조선본부(日本赤十字社朝鮮本部)’로 흡수되고 말았다. 대한적십자회는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상하이 ‘長濱路 愛仁里 39號’에서 재건됐다. 대한적십자회 재건에 힘을 쏟은 것은 이희경(李喜儆)이었다. 그는 시카고대학 의과를 졸업 후 1918년 귀국했다가 12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등과 대한적십자회 조직을 위한 논의를 진행했고, 8월 29일 ‘정부’로 부터 설립을 인가받았다. 회장에 이희경, 부회장 김성겸(金聖謙), 이사에는 여운형(呂運亨)이 선출됐다. 이로써 대한적십자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단체가 됐다. 11월 15일 안창호·이희경을 포함한 79명으로 이루어진 대한적십자회 대표들은 대한적십자회가 일본적십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선언했다. 이러한 활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지위 획득과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적십자사는 국제기관으로서 제네바협약에 가입한 독립된 주권국가가 설립한 적십자사만이 승인됐다. 때문에 대한적십자회는 국제적십자연맹에 가입을 통해 임시정부가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다. 1921년 1월 이관용(李灌鎔)이 대표로 선출되어 국제적십자총회에 참석하여 독립을 청원하고 일본적십자사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등 일본의 침략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대표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밖에도 임시정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선전활동이 꾸준하게 진행했다. 국제적십자연맹의 가입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광복 후 대한적십자사의 설립에 밑바탕이 됐다.
대한적십자회는 국제 선전활동 외에 기본적으로 간호사와 군의관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됐다. 이는 일제와 독립전쟁에 필요한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과 같이 꼭 필요한 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장기계획이 필요하였지만, 간호사의 양성은 당장 착수할 만한 사업이었기에 1920년 1월 간호원양성소를 개설하여 인력 양성에 나섰다. 또한 구제활동도 전개했다. 대한적십자회 내에 조직된 구제회(救濟會)가 기독교 선교단체와 협조하여 민족이 처한 참상을 알리면서 의연금과 구제물자를 국제적으로 지원받는 데 목표를 두고 활약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국내로 특파원을 보내 지부를 만들었고 국외에도 미국의 미주지부·하와이지부, 러시아 소왕령(小王嶺, Ussuriysk)지부 등이 조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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