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통합 검색

전체메뉴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사적지

세계 곳곳의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보세요!!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사적지

인물ㆍ단체ㆍ사건 사적지명ㆍ주제어 통합검색

인물ㆍ단체ㆍ사건사적지명ㆍ주제어을 자유롭게 검색하신 후, 관련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보세요.

인물ㆍ단체ㆍ사건 사적지명ㆍ주제어 통합검색

인물ㆍ단체ㆍ사건 사적지명ㆍ주제어 초성검색

인물ㆍ단체ㆍ사건ㆍ사적지명ㆍ주제어을 초성으로 검색하여,그와 관련된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선택하신 초성 < > 에 대한 사적지는 총 98 건입니다.

옌지 창동학교 터

사적지 종류 장소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지린성
문헌상 연길현 와룡동
한글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옌지시 소영진 와룡촌 일대
현지 吉林省 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 小营镇 卧龙村 일대
역사적 의의
1908년 오상인 등 12명의 인사들이 ‘창동소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민족학교 터
설명
창동학교(昌東學校)는 북간도지역의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의 하나였다. 설립시기는 1908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1935년 학교를 다시 세우면서 건립한 ‘사은기념비(謝恩記念碑)’에는 190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학교가 세워진 연길 와룡동은 1883년경에 한인이 80여 호가 살만큼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 찾아와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을 내세우면서 학교설립에 나섰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남성우(南性佑)·이병휘(李炳徽)·오상근(吳相根) 이었다. 주민들은 학교설립에 동의하고 후원회를 구성하였다. 참여자는 최병균(崔炳均)·최종환(崔鍾煥)·최병규(崔炳奎)·오상인(吳祥仁)·김성옥(金星玉)·정지위(鄭之亨, 鄭之衡)·지병학(池炳學)·나시영(羅時榮, 李始榮)·정윤민(鄭允珉, 全允民)·정종현(鄭鍾鉉)·오관준(吳寬俊)·한영운(韓永雲) 등 12인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의연금을 모아 1907~8년경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처음 창동서숙(昌東書塾)으로 시작하여 초등교육을 가르쳤으나, 1910년(또는 1912년) 중학부를 설치하고 창동학교라고 하였다. 정(正)·부(副) 교장은 오상근·이병휘·남성우가 맡았으며 교사는 신홍남(辛鴻南)·김종만(金宗萬)·홍우만(洪佑晩)·이진호(李鎭虎)·김이택(金履澤)·서상권(徐成權)·문경(文勤) 등이 맡았다. 중학생의 숫자는 80여 명으로 이들은 각지에서 왔으며 연해주에서 온 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하였으며, 경비는 후원회에서 부담하였다. 민족교육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1919년 용정에서 3·13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할 때 창동학교의 전체 교사들과 학생들도 참가하였다.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창동학교 교원 박문호는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1920년 1월 ‘간도 15만원사건’을 주도한 임국정(林國楨)·최봉설(崔鳳卨)·한상호(韓相浩)와 경신참변 당시 참혹하게 살해당한 정기선(鄭基善) 등이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1935년 9월 12일 창동학교가 위치한 와룡동 주민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낸 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새로 지은 학교가 바라보이는 산비탈에 사은기념비를 세웠다.

(2016) 사은기념비가 위치한 연길시 와룡동은 아직 개발이 활성화 되지 않은 농촌지역으로 창동학교가 운영될 당시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다만 진입로가 협소하여 대인원이 방문하기는 어렵다. 인근의 최봉설 가옥 터와 명동촌 인근의 15만원 사건 기념비와 연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9) 창동학교는 와룡촌 앞 언덕에 있었으나, 지금은 밭으로 변하였다.

지도보기   인쇄   목록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