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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학교 사은기념비

사적지 종류 기념비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지린성
문헌상 길림성 국자가 와룡동
한글 길림성 연길시 소영진 민주촌 민흥 제3촌민소조 / 吉林省 延边朝鲜族自治州汪清县 卧龙村 內
현지 吉林省 延吉市 小营镇 民主村 民兴 第3村民小組
역사적 의의
북간도의 대표적인 민족학교인 창동학교 학생들이 스승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
설명
1906년 서전서숙(瑞甸書塾)이 설립된 이래 북간도지역에서 민족의식 함양을 목적으로 한 민족교육운동이 전개됐다. 1907년 워룽동(臥龍洞)의 오상근(吴常根), 이병휘(李炳微), 남성우(南性佑) 등은 국권회복을 위해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선전하여 1907년 마침내 창동서숙(昌東書塾)을 설립했다. ‘창동’이라는 학교명은 해동성국의 창성을 바란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3년 뒤 1910년에는 중학부를 부설하고 창동학원(昌東學院)으로 발전했다. 당시 원장에 오상근, 부원장 이병휘·남성우가 맡았으며, 신홍남(辛鴻南)·김종만(金鍾萬)·홍우만 등의 교원이 있었다. 중학부 학생수는 80여 명이었다.
교과목은 성경·수신·국어·한문·작문·역사·지리·산술 등이었으며, 근대과학지식의 전수와 더불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함양을 중심적으로 교육하였다. 중학부에는 무장투쟁 대오 양성을 목적으로 군사훈련과를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북간도 3·13의거는 북간도에 소재한 민족학교의 학생과 교사들도 참여하였는데, 창동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워룽동의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여 항일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3·13독립운동 당시 총탄에 맞아 희생당한 박문호(朴文浩)는 창동학교 교원이었다. 이처럼 창동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독립운동의 진원지로 지목된 창동학교는 1920년 10월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 때 학교가 소실됐다. 이후 창동학교는 다시 건립되었으며, 1935년 9월 12일 창동학교 출신 주민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항일투사를 양성한 은사들의 학덕과 항일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새로 지은 학교 앞 산비탈에 사은기념비를 세웠다. 사은기념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어 학생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알 수 있다.
“은사 신흥남, 김종만, 홍우만, 이진호, 김이택, 송창희, 서성권, 문경 등. 창동학원은 기원 1907년에 창립되었다. 즉 우리 민족이 간도에 이주해온지 약 40년이 되는 때에 뜻 있는 와룡의 여러 지사들이 처음으로 소학교를 창립하였는데 이는 본학원의 기원이다. 3년후 여러 교원들이 협력하여 새로 중학부를 설치하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온갖 심혈을 기울여 우리들을 교양하였다. 위대하도다. 선생님들의 은혜, 아름다워라 창동이여, 이원 출신인 200여 명은 그들의 은공을 잊지 못하여 비석을 세워 칭송하노라”

2003년 6월에 연길시문물관리소, 민주촌민위원회, 민주소학교는 합동으로 사은비에 대하여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비석을 중심으로 10미터 이내 지역을 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콘크리트 기둥에, 철 파이프로 된 난간을 설치하여 기념비를 보호하고 있다. 기념비의 글자가 많이 퇴색했다. 글자에 다시 칠을 하는 것이 시급하다. 현재 옌지시 공원로에서 민흥 제3촌민소조로 통하는 도로가 너무 좁아 대형 버스가 진입하고 차를 돌릴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다. 그리하여 사은기념비는 역사 문화 관광 자원으로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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