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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박용만 거주지 터 (병마사호동)

사적지 종류 장소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베이징
문헌상 북경시 서성구 병마사호동 28호
한글 북경시 서성구 서4남대가 병마사호동 59호
현지 박용만 거주지 터(병마사호동) 北京市 西城区 兵马司胡同 59号 일대 / 박용만 활동지 北京市 崇文门外大街 花市 上二条 일대
역사적 의의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이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꾸렸던 곳
설명
1920년 박용만(朴容萬)은 하와이에서 베이징(北京)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독립전쟁을 강조하고자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를 개최하고 제2 보합단 조직을 주도하였다. 이를 통해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하여 경제기반을 만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1921년 9월 북경정부 재정부 관리인 중국인 장모의 딸과 결혼한 것도 이러한 이유의 하나였다. 혼인 후 거주지는 병마사호동 28호에 마련하였다. 베이징에서 자리를 잡은 후 본 격적으로 토지개간을 통한 독립군기지 건설에 나섰다. 그가 설립한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는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주변인들의 인식은 악화되고 있었다. 1924년 6월, 장춘(長春)의 일본 영사와 면회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향 철원(鐵原)에 있던 부인을 데려오려고 두 번 입국한 일 때문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 측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1924년 6월 15일 창조파의 중심기관인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로부터 파면과 제명 처분을 받았다. 또한 1924년 10월 박용만은 중국 군벌 풍옥상(馮玉祥)에게 사업을 제안한 일이 있었다. 내몽고에 한인 둔전을 개척하여 경영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들은 풍옥상은 일본 측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용만은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국내로 잠입했다. 이 일에 대해 한인사회에서 박용만의 국내 잠입과정에 총독부와 밀정 김달하(金達河)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더불어 1924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7인 결사대가 길림 일대에서 비밀공작을 벌이던 중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당한 일에 대해서도 돈 7천원을 받고 제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변절 혐의와 함께 박용만의 독립운동 노선도 비판을 받았다. 1925년 11월 풍옥상이 장작림(張作霖)에 의해 밀려나면서 새 실권자로 오패부(吳佩孚)가 복귀하자 ‘중국의 희망’이라 칭송하였다. 이어 대립적 위치에 있던 손문(孫文)과 풍옥상에 대한 비판적인 보고서를 미군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은 박용만의 활동에 의구심을 가졌던 인물들과 일제의 분열책이 작용한 부분도 있었으나 무시할 만큼 작은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변 독립운동가들과 한인사회로부터 외면받게 되었다.
1926년 봄 박용만은 약 2만원의 자금을 갖고 하와이에서 돌아와, 대륙농간공사를 중심으로 베이징 교외에 미개간지를 구매·개간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결국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 숭문문(崇文門) 밖 대륙농간공사에서 이해명(李海鳴, 李泰龍)·이초헌(李初憲)에게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절명하였다. 총격자는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두 사람은 재판정에서 자기 신분을 ‘북평(北平)의 한인독립당원’이라 하였다. 1925년에 가입했으며 박용만의 암살은 소속단체에서 사형을 판결하여 총살명령서를 우송해 왔기에 집행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독립당은 의열단이나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용만이 거주한 병마사호동의 거주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2002년 비정한 59호와 그 일대는 도시개발로 변화되었으며 현재 현대식 4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또한 병마사호동의 길 끝에는 도로가 끊어지고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었다. 대륙농간공사가 있었던 화시 상2조 거리도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부근에 오래된 집들이 몇 채 남아 있어 옛 흔적을 엿볼 수 있으나 정확한 위치 비정은 어렵다. 이마저도 현재 개발로 인하여 멸실될 위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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