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통합 검색

전체메뉴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사적지

세계 곳곳의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보세요!!

> 인물과 사건으로 보는 사적지

인물ㆍ단체ㆍ사건 사적지명ㆍ주제어 통합검색

인물ㆍ단체ㆍ사건사적지명ㆍ주제어을 자유롭게 검색하신 후, 관련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보세요.

인물ㆍ단체ㆍ사건 사적지명ㆍ주제어 통합검색

인물ㆍ단체ㆍ사건 사적지명ㆍ주제어 초성검색

인물ㆍ단체ㆍ사건ㆍ사적지명ㆍ주제어을 초성으로 검색하여,그와 관련된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선택하신 초성 < > 에 대한 사적지는 총 52 건입니다.

룽징 김약연 기념비

사적지 종류 기념비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지린성
문헌상 화룡현 명동촌
한글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룽징시 명동촌 윤동주고거 내
현지 吉林省 延边朝鲜族自治州 龙井市 智新镇 明东村 尹东柱故居 내
역사적 의의
북간도에서 활동한 기독교계 민족운동가 김약연의 기념비
설명
김약연(金躍淵)은 1868년 9월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출생하였다. 1899년 2월 가솔 및 인근의 10여 가구를 이끌고 북간도로 이주하여 명동촌(明東村)을 세웠다. 1901년 4월 중국인에게 토지 5만 평을 매입하여 학교 부지로 삼고 자신의 호를 써서 규암재(圭巖齋)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다. 김약연은 북간도지역의 한인교육과 자치권 확보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1908년 4월 김학연(金學淵)·박무림(朴茂林)·문치정(文治政)·김하규(金河奎) 등과 함께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고 초대 숙감(塾監)을 맡았으며 명동교회도 설립하였다. 이와 함께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간민회(墾民會) 등 한인 자치단체의 조직과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으로 김약연은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한국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연길도윤(延吉道尹) 도빈(陶彬)은 보호차원에서 1920년 2월 연길감옥에 구금하였다. 1922년 출옥 후 다시 명동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압박과 사회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예전처럼 기독교와 민족주의를 바탕에 둔 학교 운영을 할 수 없었다. 1925년 중학부는 폐지되어 소학교만 운영되었으며, 김약연 역시 명동촌을 떠나 룽징 시내로 이사하게 되었다. 1929년 61세의 나이로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었다. 이후 명동교회 목사로 활동하면서 민족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1942년 10월 29일 김약연은 용정시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75세로 별세하였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인 김신복(金信福)은 독립군이자 명동학교 교사인 최기학(崔起鶴)과 결혼하였으며 해방 후 용정에서 별세하였다. 둘째 김정근(金楨根)은 병원을 경영하다가 1945년 사망하였다. 셋째 김정훈(金楨勳)은 북경대학에 다녔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넷째 김정필(金楨弼)은 톈진(天津) 남개대학(南開大學) 졸업 후 중화민국(中華民國) 주경성총영사관(京城總領事館) 조선문(朝鮮文) 비서로 근무하였으나 1932년 사망하였다.

기념비는 김약연 별세 다음해인 1943년에 세워졌다. 김석관(金錫觀)이 비문을 썼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훼손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기념비각 등이 설치되었다. 김약연의 묘는 장재촌이 보이는 마을 뒷산에 부인 안연과 김정근의 묘가 함께 모셔져 있으며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지도보기   인쇄   목록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