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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로한족회대표자회의 개최지 및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지

사적지 종류 장소 국가 러시아
대륙 유럽 지역 연해주
문헌상
한글 연해주 우수리스크 자나드보롭쓰까야 15번지
현지 Россия,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Уссурийск, улица Горького, 20
역사적 의의
1918년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자회의 개최지이자 전로한족회중앙총회 결성지
설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연해주지역의 한국독립운동은 침체되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요구사항이었던 자국 내 한인의 활동에 제한을 두었다. 이에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추진된 독립운동은 침체 될 수밖에 없었다. 유력한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비롯하여 기관지인 『권업신문』 역시 폐간되었다. 뿐만아니라 이강(李剛)·정재관(鄭在寬)·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의 주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연해주지역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은 1917년 1차 러시아혁명(2월 혁명)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제정러시아가 붕괴되어 케렌스키(A.F. Kerensky) 내각이 들어섰으나 실질 권력은 소비에트(평의회)가 차지하였다. 러시아 정세가 변하자 한인들에게도 언론·집회·결사 등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한인사회는 다시 활성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1917년 6월 제1차 전로한족대표자회의 개최로 이어졌다. 회의는 각지의 한인대표 96명이 참가하였으며 최만학(崔萬學)이 회장을 맡았다. 회의 장소는 ‘니콜리스크 자나드보롭쓰까야(Zanadvorovskaya) 15번지’였다. 이 회의는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지역의 원호인(귀화한인)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에 원호인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여호인(비귀화한인)과 대부분 비귀화인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은 배제되었으며, 여호인 농민·대한인국민회 대표에게는 결의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원호인들은 한인의 자치권을 도모하고 러시아인과 동일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끌어 갔으며, 일본과에 우호관계를 맺은 케렌스키 내각을 지지하였다. 결국 전로한족대표자회는 원호인과 여호인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끝났다. 회의 후 원호인들은 1917년 6월 우수리스크(Ussuriysk)에서 고려족중앙총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7월 고려족중앙총회의 기관지로 『청구신보』를 창간했다. 고려족중앙총회는 1917년 11월 자나드로봅쓰까야 15번지에서 31번지로 이전하였으며 청구신보사와 한인회관도 함께 운영해 나갔다. 케렌스키 내각이 붕괴된 이후에는 콜차크(Kolchak)를 수반으로 하는 반볼셰비키적인 시베리아정부를 지지하였다.
한편 1918년 초 전로한족대표자회에서 배제된 여호인과 항일적·친볼셰비키적 입장을 가진 이들은 한족중앙총회(韓族中央總會, 俄領韓人會) 결성을 추진했다. 이들은 하바로프스크(Khabarovsk)를 기반에 두고 볼셰비키를 지지하였다. 원호·여호의 구분 없이 대동단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하바로프스크에서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1918년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제2회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가 개최될 당시 이 건물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실업학교 교사였다고 한다. 이곳에 각 지방 단체대표와 학교대표 등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를 통해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결성되었다.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총영사관에서 러시아정부와 협의하여 설치한 안내판이 현관에 잘 부착되어 있다. 동판은 학교에서 관리하고 있어 상태가 양호하다. 현재 우수리스크 11학교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과거 철도국 기술학교가 있었던 장소였다고 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로 철도교통이 계속 확장되자 교통의 중심지였던 우수리스크에 세워졌다. 한인들은 총회를 개최하기 위해 이곳을 임대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하바로프스크에 철도대학이 수립되면서 현재 우수리스크 11학교로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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