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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대학 구지

사적지 종류 건물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광둥성
문헌상
한글 광동성 광주시 해주구 신항서로 135호
현지 廣東省 廣州市 海珠區 新港西路 135호
역사적 의의
1920년대 중반에 한인 청년들이 많이 다녔던 대학이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설명
1924년 1월 국공합작 결의안이 통과되자 쑨원(孫文)은 국민혁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그해 2월 국립광동고등사범학교·광동공립법과대학·광동공립농업전문학교를 합병해서 국립광동대학을 설립했다. 1926년 국립중산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쑨원은 초대 교장 추로(鄒魯)에게 한국의 망명청년들을 받아들여 국비 대우를 제공해줌으로써 한국독립혁명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도록 지시했다. 추로는 한국청년들에게 시험의 편의를 제공할 뿐 아니라 학비면제 및 의류와 서적도 제공해 주었다.
광저우(廣州)에 모여든 많은 한인 혁명가들은 국립중산대학에 입학하여 자유와 독립의 길을 모색하였고, 중산대학은 수많은 한인 청년들의 배움의 전당이 되었다. 중산대학에는 김원봉 계열의 의열단원들이 다수 재학하였다. 1926∼1927년 당시 중산대학에는 김성숙(金星淑)·강세우(姜世宇)·이영준(李英俊)·김산(金山)·최원(崔園)·이활(李活) 등 진보적 혁명가가 다수 집결해 있었으며, 특히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활동을 통한 국제적 연대 구축에 진력하고 있었다. 중국 국민혁명의 주 무대였던 광둥(廣東)은 한국독립운동의 주 무대가 되어 갔고, 특히 중산대학은 황포군관학교와 함께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쑨원 사후 1926년 4월 여운형(呂運亨)은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汪精衛)의 초청으로 광저우에 와서 장제스(蔣介石)을 만나 독립운동자금지원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 대신 중산대학과 황포군관학교에 한인 청년들이 입학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국립중산대학 유학생 중 한인 유학생이 제일 많았고, 한국인 학생 수는 1927년 5월까지 총 57명이었다. 12월 광저우 코민이 실패하자 사회주의계열 학생들이 광저우를 떠나 중산대학 한국 유학생 수도 줄고 독립운동도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1932년 상하이(上海)에서 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발생하여 한인을 대규모 수색하고 체포하자 국립중산대학에는 다시 한국 애국청년들이 모였다. 1933~1935년 50여 명이었던 한인 유학생이 1937년에는 80명으로 증가했다.
신항서로(新港西路) 중산대학은 현재도 중산대학 교정으로 사용 중이다. 현재 광저우시 신항서로에 소재하는 중산대학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던 영남대학과 합병하여 국립중산대학이 되었기에 한국 독립지사들이 재학하던 중산대학은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던 문명로 215번지의 광동국립대학이다.
광동국립대학 개학과 함께 쑨원은 문명로 캠퍼스가 좁아 신축 확장 이전을 고려하였고, 1935년 국립중산대학은 개교10주년을 기해 석배교(石排橋)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1935년 이후에 한국학생들이 공부하던 중산대학은 현재 중산대학캠퍼스가 아니고 석배교 캠퍼스였다. 현재 천하구(天河區) 천수로(天壽路) 입구에 과거 석배교 중산대학 석패방(石牌坊)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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