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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거주지 하연추

사적지 종류 장소 국가 러시아
대륙 유럽 지역 연해주
문헌상
한글
현지 Россия,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Хасанский район, село Цуканово 진입로 부근
역사적 의의
러시아 연해주지역 의병의 근거지 가운데 한 곳
설명
1860년대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지신허(地新墟)에 이어 연추(煙秋)에도 마을을 세웠다. 1864년 경 상연추(上煙秋), 1867년 경 하연추(下煙秋)가 각각 형성된 것이 그것이다. 이후 상·하연추 중간지역에 농가들이 늘어나면서 중연추(中煙秋)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별리(上別里)·중별리(中別里)·하별리(下別里)라고도 불리웠다. 연추는 두만강을 경계로 한·러·중 3국 국경이 가까워 군사·교통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 병영이 있던 노보키예프스크(Novokievsk; 현 크라스키노)와 블라디보스토크·훈춘(琿春)등으로 갈수 있는 포시에트(Posyet)도 가까웠다. 독립운동가들도 연추를 중심으로 훈춘·북간도·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1908년 봄 최재형(崔在亨)·이범윤(李範允)·이위종(李瑋鍾)·안중근 등은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국내진공작전에 나섰다.
연추는 연해주 남부지역 행정도 담당하였다. 1884년 조선과 러시아가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인마을은 러시아 행정단위에 편입되었다. 도헌(都憲)·사헌(社憲)제도가 도입되면서 연추에는 도회소가 설치되었다. 연추도회소는 두만강 및 중국 훈춘과의 국경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한인마을을 관할하였다. 최재형은 최초로 연추의 도헌으로 임명되어 사회·교육·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1914년경에 이르면 연추에는 400호가 살고 있었으며 주변지역 인구수는 2,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경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연추는 중·러 갈등 및 소련 내부의 정세변화에 휩쓸렸다. 1929년 만주군벌 장학량(張學良)과 중동철도를 둘러싼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연해주 남부 하산(Khasan)군의 한인마을 160여 곳이 폐쇄되었는데 이때 중연추가 사라졌다. 상연추는 1937년 한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폐쇄되었다. 이후 러시아 농민들이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1964년 폐쇄되고 말았다. 러시아인들이 함께 살았던 하연추는 한인들이 떠난 후 러시아 마을로 남게 되었다.

연추에 온전한 한인마을 흔적이 거의 없다. 현재 건물 기단부분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또한 연자방아와 같은 생활유물이 흩어져 있어 원래 마을의 위치나 규모를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있다. 앞으로는 러시아 마을의 전반적인 형태와 규모를 같이 살펴 한인마을과 차이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하연추 마을의 위치를 중심으로 조사를 넓혀나간다면 한인이주사와 독립운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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