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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중국중앙군사정치학교 터

사적지 종류 장소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후베이성
문헌상
한글 호북성 무한시 해방로 259호
현지 湖北省 武汉市 解放路 259号
역사적 의의
한인 청년들이 군사간부로 육성되던 곳
설명
독립운동 시기 중국의 정부 육군군관학교의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이다. 그러나 소재지 근처가 황포도였기 때문에 흔히 황포군관학교로 불렸다. 광주(廣州)에 있던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의 지배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각지에 분교를 세웠다. 대표적으로 광동(廣東) 조주분교(潮州分校), 광서(廣西) 남영분교(南寧分校), 호남(湖南) 장사분교(長沙分校), 호북(湖北) 무한분교(武漢分校) 등이 있다. 이에 따라 무한분교는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라고 하였다. 무한분교는 1927년 2월 무창(武昌)의 양호서원(현재 무창실험소학교)에 설립되었다. 여기에 특별반이 설치되어 한국학생들을 받아들였고, 2백 명 가까운 인원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황포군관학교의 입교과정은 분명하지 않지만, 일부가 밝혀지고 있다. 먼저 중국국민당 정부의 실력자인 진과부(陳果夫)를 통하여 이루어진 경우이다. 그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소앙·박찬익 등이 추천한 인물을 광주로 보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시켰다. 의열단의 경우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924년 1월 국공합작의 성립이후 의열단의 투쟁노선은 대중투쟁으로 전환되어 중산대학과 황포군관학교의 입교를 추진하였다. 의열단장인 김원봉 등은 손문과의 면담을 통해서 황포군관학교입교를 허락받았고, 황포군교 교장실 부관 겸 교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손두환을 통하여 입교가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알려진 한인 입교생의 상황을 살펴보면, 본교는 3기생(1925. 7~1926.1) 5명, 4기생(1926. 3~1926. 10) 24명, 5기생(1926. 11~1927. 8) 5명, 6기생(1928.4~1929. 5) 9명 등이었다. 무한분교의 경우는 1927년 무렵의 5기생에 26명이 재학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광주 황포군관학교가 1926년경 무한으로 이전하면서, 제2의 황포군관학교인 무한분교가 개교하였다. 제5기·6기가 바로 이곳에서 배출되었으며, 약 200명의 한인 청년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이곳에 한인 청년들이 활동했음을 알리는 표지판 설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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