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사적지
세계 곳곳의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보세요!!
홈 > 지역별 사적지 > 중국
우한 조선의용대 창설 경축행사지 (YMCA)
사적지 종류 | 장소 | 국가 | 중국 |
---|---|---|---|
대륙 | 아시아 | 지역 | 후베이성 |
문헌상 | 삼교가 한구중화기독교청년회(YMCA) | ||
한글 | 호북성 무한시 여황피로 중산대도 1090호 | ||
현지 | 湖北省 武汉市 黎黄坡路 中山大道1090号 |
- 역사적 의의
- 1938년 10월 13일 조선의용대의 성립 경축행사가 개최된 곳
- 설명
-
1937년 7월 시작된 중일전쟁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각 단체 사이에는 연합전선 문제가 대두하였다. 이로써 우익진영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엽합회와 좌익진영의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이 가운데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민족전선은 무장부대의 조직과 대일항전의 참여를 목표로 하였다.
민족전선은 1938년 7월 중앙군사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 졸업생들이 본부가 있는 한커우로 합류해오면서 본격적으로 무장부대를 조직하는 사업에 집중하였다. 민족전선은 1938년 7월 7일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의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이 제안은 장제스(蔣介石)의 재가를 거쳐 모든 항일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무장부대를 규모상의 문제로 '軍'보다는 '隊'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담당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1938년 10월 2일 한국 및 중국 양측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지도위원회는 군의 명칭·조직 인선·편제·활동경비 등을 결정하였으며, 이후 조선의용대를 지도하였다. 지도위원회 위원은 중국 군사위원회정치부 측 인원 4명과 민족전선 산하 단체의 대표 4명(김원봉(金元鳳)·김성숙(金星淑)·김학무(金學武)·유자명(柳子明))이 선정되었다. 양국의 협의를 통해 민족전선은 1938년 10월 10일 한구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대일본군 반전선전·대중국민 항전 선전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조선의용대 창설식에는 중국 측의 주요 인사들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용대 결성에 직접 관여한 정치부 부장 천청(陳誠)과 비서장 하충한(賀衷寒)은 물론, 조선의용대 창설에 공헌한 왕판성(王芃生)·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 같은 인물들도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부 부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정치부 제3청 청장 궈모뤄(郭沫若)은 참석하여 연설하였다고 한다.
조선의용대가 성립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축행사가 있었다. 이는 10월 13일 한커우 한구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이 경축행사에는 「민족해방가」·「자유의 빛」·「아리랑」을 비롯한 노래와 「쇠」·「두만강변」 등의 연극이 공연되었다. 1938년 10월 14일 『신화일보(新華日報)』에는 조선의용대 성립 소식 및 김원봉의 연설과 유예대회에서 연출한 내용이 자세히 보도되었다.
1938년 한구기독교청년회 건물인 이곳은 조선의용대의 성립식이 거행된 곳이 아니라 경축 행사가 진행된 곳이다. 1938년 10월 14일 자 『신화일보』에 이곳에서 조선의용대 경축행사(유예대회)가 개최되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 2층에 대연회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