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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명 구지 진열실

사적지 종류 기념관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후난성
문헌상
한글 후난성 창사시 푸룽구 호남농업대학
현지 湖南省 長沙市 芙蓉區 湖南農業大學
역사적 의의
독립운동가이자 중국의 저명한 농학자이기도 한 유자명의 전시실
설명
유자명은 1922년 재차 중국에 망명한 이후 신채호, 이회영 등 급진적 경향의 혁명사들과 긴밀히 교류하였으며, 이들은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정부라는 조직 형태보다 아나키즘의 연합조직을 선호하였다. 창립 당시 이회영·이을규·이정규·백정기·유자명 등 6명이 참석하였다.
유자명은 동경제국대학에서 아나키즘의 이론을 접하고 크로포트킨의 저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크로포트킨의 “호상 부조론(互相扶助 論)”(Mutual Aid)의 영향이 컸다. 그는 호상 부조론을 다윈의 진화론과 비교하면서 생물진화의 원인이 생존투쟁이 아니라 호상 부조가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 크로포트킨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이에 한·중·일 민족의 호상 부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일본 군국주의체제(일본정부)라고 판단하여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유자명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의열단 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활동하였고, 1927년 5월 의열단장인 김원봉과 무한으로 이동하였다. 무한에서는 동방 피압박민족연합회가 조직되었는데, 그는 김규식·이검운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이후 유자명은 박찬익(朴贊翊)의 부탁으로 손문학설의 번역작업을 맡았던 것을 인연으로 중국 고위관리와 교류하였다. 그는 박찬익에게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선전부장인 엽초창(葉楚槍)을 소개받았고, 중앙통신사를 경영하는 원소선(袁紹先), 서점을 운영하는 진광국(陳光國) 등과 교류하였으며 일본인 아나키스트인 전화민(田華民)도 알게 되었다. 특히 원소선은 1929년 신해혁명의 희생자를 기념하는 농장을 설립하여 유자명에게 농업 생산지도를 부탁하였는데, 그는 이를 계기로 농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유자명은 상해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농학자로서의 활동과 함께 중국인 아나키스트와 연합하여 한·중 공동전선의 매개체 구실을 하였다. 아나키스트인 굉호생(匡互生)이 설립한 이 학교는 농촌교육과의 교무주임인 진범예(陳範豫)를 비롯하여 마종융(馬宗融)·나세미(羅世彌) 등이 모두 아나키스트였다. 이러한 특수한 환경을 바탕으로 이곳은 아나키스트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그는 재직시기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여 의장 겸 대외책임자로 선출되었고, 나아가 한·중 아나키스트들과 공동전선이 이루어진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와함께 1934년 청룡산의 농장에서 학생들과 농사를 지었고, 남경건설위원회 동류농장(東流農場)에서 원예를 가르치는 등 꾸준히 활동을 이어나갔다.
유자명의 활동은 1930년 후반이 되면서 주로 중국 내 한인혁명세력의 통합에 집중되었다. 당시 남경(南京)에서는 김원봉의 조선혁명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최창익의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이 통합하여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에 유자명의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도 참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1944년 4월에는 임시정부 제5차 개헌에 앞서 조소앙 등과 7인 헌법기초위원을 맡았다.
해방 후 유자명은 귀국을 결심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귀국이 미뤄지면서 그는 장사(長沙)로 거처를 옮겼고, 호남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농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13년 유자명의 제자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호남대학(현재 호남농업대학) 근무 당시거주했던 집에 전시실을 만들어 놓았다. 전시는 총 5개 부문으로 이루어졌다. 학교측에서는 전시관 및 생가의 내부 집기 등을 공개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장사시 문물보호단위(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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