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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동 경신참변지

사적지 종류 표지석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지린성
문헌상 연길현 장암동
한글 길림성 연길현 동명용진 인화촌 7대(동명촌 3대)
현지 吉林省 龙井市 东城勇镇 仁和村7隊
역사적 의의
일제의 경신참변으로 희생된 장암동 주민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석
설명
1920년 10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한 일본제국주의는 마적소탕과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에 파견하였다. 일제가 군대를 파견한 실질적인 목적은 간도지역에 대한 확고한 세력부식과 함께 항일독립군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간도에 파견된 일본군은 조선주둔의 제19사단 예하부대가 주축이 되었다. 일제는 이미 북간도 한인사회에 대한 ‘토벌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하였으며, 「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으로 구체화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일제는 북간도 한인사회를 철저히 짓밟았고, 이러한 잔혹한 행위는 한인사회를 통제하는 채찍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일본영사관의 움직임은 당시 독립운동단체 및 한인사회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특히 일본군과 연결하여 독립운동가의 인적사항과 동향, 단체의 병력과 장비상황 등을 예의 주시하면서 정보수집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은 돌발상황이 아니라 면밀하게 계획된 학살이었다. 장암동참안(獐巖洞慘案)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암동은 지금의 룽징시(龍井市) 동성용진(東盛涌鄕) 동명촌(東明村)으로 진정부에서 동남쪽으로 6㎞ 떨어져있다. 일명 노루바위골로 불렀다. 《장사대공보(長沙大公報)》에는 3회에 걸쳐 경신참변의 실상을 알린 영국 선교사들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 가운데 1920년 12월 20일 자의 주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10월 31일 직접 뇌라파위(노루바위) 마을로 갔다. 이 마을은 작은 강 유역 꼭대기에 있었는데 그 사이는 12마을이나 떨어져 있었다. 오늘은 일본 천황의 생일이기 때문에 도중에 일본병사와 일본경찰들을 간섭하지 않고 우리는 큰길로 돌아서 가기로 했다. 갑자기 먼 산에서 짙은 연기가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우리들은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우리는 목격자로서 29일 이 촌락에서 일어난 실제상황을 들었다. 오늘 동이 틀 때 일본 보병 전체는 군장을 하고 그리스교 신도 마을을 둘러싸고 이는 강 유역의 윗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쌓여 있던 보리에 불을 붙여 불태웠고 계속 집에 있는 거주민을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무릇 남자와 늙은 사람 어린이를 막론하고 즉시 총살했고 그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불에 넣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뛰어오르고 피가 흘러 뒤섞였다. 시체는 순식간에 코타르가 되어버려 구별할 수 없었다. 사지가 잘린 이도 있었으며, 분산되어 재가 되었다. 잘린 다리와 잘린 손을 원하는 곳에 안치하고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너무 화가 나서 사진기를 들 수 없었다. 사진을 겨우 찍었다. 기도할 때 교외의 한인과 중국인들이 함께 보았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을에 있는 예배당과 소학당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마을에 새 무덤 31개가 생겼다. 이외에 불탄 마을은 26개였으며 사망자는 145명이었다."

심여추(沈茹秋)는 연변조사실록에서 “일본군은 10여 리에 산재해 있는 장암동마을을 한꺼번에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으며, 생명체 같은 짐승도 한 마리 남지 않았다”라고 할 만큼 장암동의 폐해는 형언할 수 없는 대학살극이었다.
1999년부터 룽징3ㆍ13기념사업회에서 장암동 참안지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희생자 묘소와 석비가 세워졌다. 2010년에는 묘역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진행하였다. 묘소에 대한 단장, 묘역 주변에 철장을 세워 가축의 진입을 차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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