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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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거주지
사적지 종류 | 장소, 기념관 | 국가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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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 아시아 | 지역 | 저장성 |
문헌상 | 매만가 17호 | ||
한글 | 절강성 가흥시 일휘교 17호 | ||
현지 | 浙江省 嘉兴市 日晖桥 17号 |
- 역사적 의의
-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검거를 피해 자싱으로 피신한 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처로 이용된 건물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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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임시정부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상하이(上海)를 떠나게 되었다. 그동안 임시정부를 보호해 주던 프랑스 조계 당국은 상황의 심각성 때문에 일제의 독립운동가 체포 인도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일경은 프랑스 조계에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여 안창호(安昌浩)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피체하였고, 임시정부 청사를 급습해 제반 문서를 압수하였다. 결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 안착할 때까지 8년간의 이동시기를 맞게 되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하이를 떠나 여러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이중 이동녕(李東寧)을 비롯한 이시영(李始榮)·엄항섭(嚴恒燮)·김의한(金毅漢) 등의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중국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으로 피신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국민당 산하 천궈푸(陳果夫)와 천리푸(陳立夫)가 주도하는 CC단(團)이 자싱에 있는 추푸청(褚補成)에게 부탁해 김구(金九)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피신처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은 김구보다 먼저 자싱에 도착하여 김구가 피신했던 매만가(梅灣街) 76호와 약 300m 떨어진 곳에 머물렀다.
김구와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935년까지 자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거 이후 이동녕과 김구는 자싱으로 피신했고,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이전하였다. 김철(金澈)과 조소앙(趙素昻)이 항저우에 정부의 청사를 마련하고 정부를 유지해 나갔지만, 주요 인사들은 자싱과 난징(南京)에 흩어져 있었다. 특히 중국국민당 정부의 소재지인 난징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자싱은 또 하나의 거점이 되었다. 김구는 중국 측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둘러싸고 임시정부 내에서 발생한 오해,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임시의정원과 국무위원에서 사퇴하고, 한인애국단 운영 및 장제스(蔣介石)와 국민당의 지원 아래 군사간부 양성에 주력하였다.
자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피난처 건물은 청조(淸朝) 말년에 나무와 벽돌로 만들어졌다. 건물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2층 건물로 4칸의 방과 마당이 있으며, 총 부지면적은 904㎡이며, 전시 면적은 332.5㎡이다. 1995년 자싱시가 자체적으로 보수공사를 진행하여 전시관을 개관했다. 2001년 독립기념관과 자싱시가 공동으로 전시 보수를 진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층 전시는 총 5개 주제로 구성되었다. 2층은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생활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휴일과 국경일에 관계없이 매일 전시관을 개방하고 있다.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점심시간은 11시 30분에서 오후 1시 30분까지이다. 이 건물은 역시 김구 피난처와 마찬가지로 2000년 5월과 2005년 3월 각각 자싱시문물보호단위와 저장성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