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콴뎬 이진룡 기념원

사적지 종류 장소, 기념관, 기념비 국가 중국
대륙 아시아 지역 랴오닝성
문헌상 관전현 청산구 아하구
한글 요녕성 관전현 청산구향 구대구촌 왼쪽 산비탈
현지 辽宁省 宽甸县 青山沟乡 旧大久村 左边山坡
역사적 의의
의병장이자 서간도지역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이진룡과 그의 부인 우씨의 기념비
설명
이진룡은 1879년 황해도 출생이다. 안중근과 고향이 같고 나이도 같아서인지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도 의기투합하여 일을 진행했다. 이진룡과 우씨부인의 만남은 우병렬이라는 유인석 의병진의 참모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병렬은 이진룡의 삶의 멘토였다.
경술국치 이듬해(1911년) 이진룡은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청산구 은광자촌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유인석 의병진에 속하는 이진룡은 장인 우병렬과 함께 독립군단 통합운동에 힘을 모았으며, 독립군의 존립 기반이 되는 군자금 모집을 직접 감행했다. 이진룡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운산 금광 마차를 습격하였지만, 일제가 미리 알아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이진룡은 1917년 5월 관전현 청산구에서 일본외무성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만주지역에는 ‘독립군반 밀정반’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로 일본의 끄나풀이 많았다. 이진룡이 체포된 것도 일본 주구의 밀고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이진룡은 1918년 5월 1일 평양 감옥에서 장남에게 “나 죽은 뒤에 나에게 큰 은혜를 준 선생의 사당에 참배하고 아비 죽은 것을 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이진룡이 순국하자 그의 부인도 청산구 은광자에서 순절하였다.
청산구 촌민들은 1919년 3월 이진룡과 우씨부인의 사랑의 숭고함을 기리기 위해 의열비와 우씨부인 묘비를 세웠다. 1977년 환인저수지가 수거되면서 이진룡의열비는 산비탈 위로 옮겨 설치하였다. 따로 떨어져 있던 의열비와 묘비는 1991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 설치되었다.
다음은 청산구향 인민정부가 관전현에 올린 이진룡과 우씨 부인에 관한 24호 문건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저명한 의병장령인 이진룡은 생전 오랜 기간 청산구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민중 속에서 극히 높은 성망을 가졌으며 세인의 숭고한 존경을 받았다. 이 선생이 영용히 순국한 후 그의 부인 우씨도 청산구 은광자에서 순절하였다. 당지 민중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우씨의 유체를 안장하였다. 이 선생의 항일의거와 우씨의 견강한 절개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지 민중은 이씨 부부 의열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을 새겨 영용한 행위와 견강한 절개를 널리 전해지게 하였다.

2008년 독립기념관에서 지원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주변정화로 많은 사람이 참배할 수 있게 했다. 왼쪽의 이진룡 의열비와 그 옆의 <유명조선국열부유인우씨묘>비가 서 있다. 의열비는 115㎝×60㎝의 크기로 아래의 글귀가 써져있다.

조선의사 이진룡
열녀 우씨부인과 함께 곰 잡았노라
남편은 나라 위해 죽었으니 문산의 충신이요
부인은 남편 위해 순절하니 홍실의 기풍일세
해지면 달 솟아 봉황은 쌍쌍이 날고
두 충렬 서로 알고 영원한 빛 뿌리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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